Veiry's Personal Homepage S8 -The classic-

순대와 순대국

180608

최근 한 순대국집에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 집에서 멀지 않은 신설동에 있는 가게인데, 우연히 발견하기엔 거의 불가능할 만큼 외진 골목길 안에 있는 허름한 가게다. 심지어 간판도 없어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간판 없는 순대국집"으로 통한다. 할머니 한 분이 혼자 하시는데, 순대국만 놓고 보더라도 내가 항상 극찬하는 대구의 돼지국밥들과 겨뤄볼 만할 정도로 훌륭하다.

메인인 순대국만으로도 웬만한 서울의 다른 국밥집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데, 심지어 서비스로 머리고기를 준다. 이게 또 얼마나 훌륭한지, 다른 가게였다면 이 서비스 고기만으로도 8천원은 받았을 것이다. 이만큼 뛰어난 순대국이 단돈 6천원이라니 세상에. 이러다 보니 단골들에게 꽤 인기 있고 또 할머니 혼자 하시다 보니 많은 양을 준비하기 어려워서 대개 저녁 6시 전후면 그날 준비한 고기가 떨어져 문을 닫는다. 웬만한 직장인들에게는 그림의 순대국인 셈이다.

그런데 이 순대국에는 큰 특징이 있다. 바로 순대가 하나도 안 들어간다는 점이다. 트위터에 이 순대국집 소개했더니 리트윗이 꽤 됐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순대가 안 들어가는데 순대국이라니 장난해?" 라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붕어빵이야 재료가 아닌 모양이 붕어라 붕어빵이고 오히려 진짜 붕어가 들어간다면 곤란할 수 있겠지만, 순대국은 그렇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거의 모든 순대국집에는 옵션이 있는데, 바로 "순대만" 과 "고기만" 이다. 여기에 좀 더 복잡한 곳은 내장까지 더해져 몇 가지 옵션이 있기도 하지만 기본은 순대와 고기가 겨루는 형국이다. 세상의 어떤 음식이 그 음식 이름에 들어가는 재료를 빼고 내는 옵션이 있단 말인가? "김치찌개에 김치 빼고", "닭도리탕에서 닭 빼고", "냉면에서 면 빼고" 모두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왜 유독 순대국에서는 순대 빼고라는 옵션이 버젓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 말은 즉 순대국에서 순대란 생각보다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서 조금 찾아 봤더니 어느 정도 실마리가 풀렸다. 1924년 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에는 순댓국이 "돼지 삶은 물에 내장을 넣고 기호에 따라 우거지와 함께 끓인 국" 이라고 나와있다고 한다. 또 순대라는 단어는 만주어 "셍지 두하"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셍지는 피, 두하는 창자를 뜻한다고 한다. 순대가 창자에 이것저것 넣고 익힌 요리를 뜻하면서도 또 돼지의 창자를 비롯한 부속물을 일컫는 단어로도 썼다고 하니, 순대국에 우리가 생각하는 순대가 꼭 들어가야 하는 법은 없는 듯하다.

게다가 순대국의 핵심은 역시 "순대"보다는 "국"에 있다. 순대는 거의 토핑 개념으로, 특히 당면 순대는 같이 넣고 끓인다고 해도 국물 맛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는 감자탕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순대국처럼 "감자 빼고"라는 옵션이 있진 않지만, 감자탕에서 사실 중요한건 감자가 아니라 돼지뼈니까 말이다. 물론 감자탕의 감자가 potato가 아니라 탕에 들어가는 고기를 뜻한다는 설도 있지만, 대개는 potato를 떠올리지 않는가. 어쨌든 순대 없는 순대국과 감자 없는 감자탕은 무리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고기와 부속물 없이 순대로만 끓인 국물이나 돼지뼈가 없는 감자탕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이런 순대국 같은 개념이 많은 듯하다. 겉으로 내세우는 가치가 본질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 하거나, 아예 표리부동이라 할 만큼 다른 일도 많다. 겉으로 보이는 순대에 집착하기 보다는 내면을 이루는 "순대국" 의 정체성을 보고 맛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Ps. 참고로 네이버에 순대국을 검색하면 "순댓국이 바른말입니다." 라고 나온다.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