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iry's Personal Homepage S8 -The classic-

대구지하철 노선도와 인식의 전환점

201129

돼지국밥을 정말 좋아한다. 돼지국밥 하면 대개는 역시 부산을 떠올리는데 나는 대구의 돼지국밥을 더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부산에 간 지는 좀 됐고 그 때는 돼지국밥을 잘 몰랐기 때문에, 지금 다시 부산의 돼지국밥을 먹으면 어쩌면 대구보다 낫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현시점에서 내게 최고의 돼지국밥 도시는 대구다. 대구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고 최근에 그나마 지인이 몇 생긴 정도로, 대구 자체에 무슨 용건이 있지는 않다. 오로지 돼지국밥을 먹기 위해 대구에 간다. 지난번에도 2박을 하면서 돼지국밥만 네 끼를 먹었을 정도다. 이 쯤 되면 내 진심이 전해졌겠지?

서울 사람으로서 대구에 가면 종종 빵터지는 재미있는 일들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신기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면허가 없어 주로 대중교통으로만 이동하는 나는 물론 대구에도 KTX나 고속버스를 타고 가고, 현지에서도 당연히 지하철과 버스를 애용한다. 아주 어려서부터 시내버스를 타왔기 때문에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에는 큰 불편이 없는 편이다. 대구도 몇 번 가고 나니 이제 자주 가는 동네는 종종 그 동네를 잘 모르는 대구 사람보다도 자세히 알기도 한다. 여튼 대구에서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의 일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난 거의 대중교통 '마스터'라 해도 될 정도로 처음 가는 도시의 대중교통에 쉽게 적응한다. 특히 지하철이 훨씬 복잡한 서울에서 30여 년을 살았기에 서울에서는 굳이 노선도를 안 보더라도 목적지를 갈 때 몇 호선을 타서 어디서 갈아타고 갈지 금방 나온다. 그에 비해 대구는 이제야 3호선, 게다가 각 노선간 환승역도 하나뿐이니 어려울 게 전혀 없다. 지명이 익숙하지 않은 점을 제외하면 오히려 서울보다도 쉽다. 맛있는 국밥집을 찾아 노선도에서 대충 해당 역의 방향만 확인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국밥아 기다려라!

한참을 가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라? 분명 노선도에서 방향을 제대로 확인하고 탔는데, 어느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노선도에서 내가 탄 역을 중심으로 분명 오른쪽으로 가는 걸 탔는데 지금은 왼쪽으로 가고 있었다. 단순히 내 실수라기엔 너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 반대로 가는 열차를 타면서 다시 노선도를 확인했다. 잠시 뭐에 홀린 듯 노선도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쉽다고 너무 방심했군' 그렇게 다시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지하철 안에 붙은 노선도를 봤는데...다시 또 노선도가 거꾸로 된 게 아닌가!? 다행히 지금은 내가 가는 방향 자체는 맞았다. 다만 노선도의 방향이 내가 아까 본 노선도와 정반대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그리고 이내 서울 지하철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나에겐 생각지도 못하던 일이 일어났다. 지하철 안 이 쪽 벽면과 저 쪽 벽면에 붙은 노선도의 방향이 서로 다른 것이었다.

자, 내가 지금 1호선의 한 쪽 끝인 안심역을 향해 가고 있다고 치자. 선내 중앙에서 지하철이 가고 있는 방향을 보고 선다. 그럼 내 좌우로 문이 있고 각각 그 위에 노선도가 붙어 있다. 왼쪽을 보면 다음과 같은 노선도가 있다. 분명 안심역은 오른쪽 끝에 있다.

그런데 다시 오른쪽을 보면 이번엔 안심역이 왼쪽 끝에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장난인가? 왜 노선도를 헷갈리게 한 방향으로 안 만들고 이랬다 저랬다 하게 만들었을까. 내 잘못이 아니다. 이러니 잘못 탈 수 밖에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며 몇 번이고 왼쪽을 봤다 오른쪽을 봤다 되풀이했다. 그리고 순간, 게임 속에서 보이지 않던 새로운 비밀 통로를 찾은 듯한 느낌과 함께 어떤 퍼즐이 풀렸다. 아...!

서울에서 주로 생활한 나는 평소에 노선도를 2차원 평면 위에서만 이해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실제 2차원 평면 지도와 노선도가 대략 일치한다. 노선도는 지도처럼 그 위치에 정확히 그릴 필요는 없지만 대략 방향은 비슷하게 나타내므로. 그러니 2차원에서만 바라보면 대구지하철 노선도는 명백히 틀렸다. 하지만 선내 중앙에 서서 좌우를 번갈아 쳐다보다 새로운 느낌이 순간 튀어나왔다. 노선도를 만약 3차원으로 바라본다면!?

즉 평면으로 보는게 아니라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열차가 진행하는 방향에 내가 가는 역이 있게 그린다면, 지하철 한가운데에 투명한 홀로그램 노선도가 공중에 떠 있다면, 오른쪽에서 그 홀로그램 노선도를 보는 사람은 오른쪽 끝에 안심역이 있다고 말할 것이고, 왼쪽에서 보는 사람은 왼쪽 끝에 안심역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 홀로그램 노선도를 마치 데칼코마니하듯 반으로 갈라 양 문 위에 붙여 놓았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2차원 평면에 있는 노선도보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더 빠를 수도 있다.

약간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직선 위에서만 움직이던 존재가 평면을 발견했을 때, 또 평면에서만 움직이던 존재가 입체 공간을 발견했을 때와 같이 나도 완전히 인식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이게 익숙하다면 오히려 서울의 2차원 평면 지도가 훨씬 불편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물론 서울은 일단 순환선이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때의 경험은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갈수록 기술 발전 속도는 빨라진다. 꼭 기술뿐 아니어도 금세 새로운 개념이 나오고 조금만 방심하면 영영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엄습한다. 나도 계속 나이를 먹고 또 언젠가는 최신 기술이든 개념이든 트렌드든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어떤 새로운 경험이 눈 앞에 펼쳐질 때, 최소한 지금까지 내가 배워왔던 또 경험했던 지식과 다르다 하여 그것이 바로 틀렸다고 단언하지 않고 최대한 수용해보려는 마음가짐은 잃지 않았으면 한다. 인류 최고의 천재였던 아인슈타인조차 양자역학은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나같은 장삼이사의 필부는 오죽하겠냐만은 그래도 '아 뭐 이제 이정도면 됐어'하고 포기하는 것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대구는 나에게 훌륭한 국밥뿐 아니라 이처럼 신기한 체험도 할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도시다. 아참, 대구에서 돼지국밥을 먹는다면 일단 청도돼지국밥을 가라. 이 점에서 만큼은 꼰대가 되어도 상관 없다.